경기민요가 누군가를 위한 음악이 될 때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시나위 악보가게 Ⅳ <환갑> 리뷰

예술과만남 2023.10-2023.11

<환갑>은 무대 뒤 큰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익명의 사진들로부터 시작된다. 꽤 긴 시간 침묵 속에서 수십 장의 사진이 스쳐 가지만 지루할 틈은 없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사진들은 유년 시절부터 결혼 후 가정을 꾸려 자식을 길러내기까지 인간의 평범한 삶을 함축하고 있다. 객석 곳곳에서 크고 작은 웃음이 번진다. 사진은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이윽고 시끌벅적한 청춘가가 흘러나오면 의문의 중년 여성들이 한명씩 무대로 등장해 긴 줄넘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실제로 환갑을 맞이한 평범한 여성들이다. 아슬아슬 줄을 넘는 그들의 모습 뒤로 각자의 소개 영상이 병치 된다. 그들은 세계 여행을 떠나고 피아노를 잘 치고 싶은, 여전히 꿈 많은 중년이다. 무대에 익숙하지 않은 듯 수줍은 중년의 여성들이 돌연 공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관객들도 예측 불가한 모험으로 인도된다.

이 공연에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관객이 있다. 공연으로 초대된 주인공들의 가족이다. 주인공의 아들이자 딸, 남편인 그들은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와 감사의 인사를 목소리로 전한다. 가족들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리한다. 쑥스러워 평소에는 하지 못했을 사랑과 진심의 말은 <환갑>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이르러서야 담담하게 흘러나온다.

내밀한 이야기가 무대와 객석을 오고 가는 가운데 관객들도 자연스레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렸을 것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어렵고 그저 삶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위대하다는 사실을 아는 나이가 되면, 그제야 부모님의 삶과 노고를 조금씩 헤아릴 수 있게 된다. <환갑>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견뎌낸 작은 영웅이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주인공들을 위한 환갑잔치는 경기민요 메들리로 본격화된다. 창부타령, 한오백년, 양산도, 자진방아타령, 뱃노래 등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전통 국악기 편성의 반주에 경기민요 소리꾼인 하지아, 심현경, 박진하, 함영선의 화려한 독창과 합창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는 가족과 인생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춧돌 위에 경기민요를 ‘지금의 음악’으로 쌓아 올린다. 경기민요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음악이 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환갑>은 극장을 파티장으로 바꾸기 위해 다시 한 번 심기일전한다. 빠른 템포의 하우스, 테크노로 편곡된 경기민요를 무대로 소환해 흥을 돋운다. 경기민요만이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후렴구를 비틀고 반복적으로 되감으며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관객들은 무대로 초대되고 긴 춤판이 벌어진다. 무대에서 시작되어 객석 끝까지 전달되는 금빛 은빛의 풍선은 무대과 객석, 공연과 놀이의 경계를 능청스럽게 허문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환갑을 맞이한 주인공들의 인생이 다시 시작되며 미래로 달려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시나위 악보가게 시리즈는 국악에 대한 문턱을 낮추기 위해 기획된 소품집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공연은 모든 단원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음악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여타 국악관현악단과는 다른 행보다. <환갑>은 2023년 시나위 악보가게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각각의 단원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의 색깔이 얼마나 다른지 경기민요라는 렌즈를 통해 보여준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는 경기민요를 어느 때보다 가까운 음악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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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으로 확장된 여성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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