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과 손 사이
<숨겨진 차원> 연계 책자 『전통』 수록
* 일러두기:이 글은 H에게 전통을 둘러싼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즉흥적으로 말을 하고 그 말의 일부를 글로 옮긴 것이다. 그간 나에게 누적된 지식, 질문, 기억, 성찰 등을 통제하지 않고 즉석에서 소환하는 구술 형태를 띠도록 했다. 반복되는 말이나 망설이는 말(filler words)을 다듬는 등 가독성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윤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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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있어. 나는 오랫동안 정형화된 틀에 맞춰서 글을 써왔단 말이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한테체화된 글의 형식이 있어. 매끄럽고 잘 정돈된 형태의 글이라고 해야 되나.누가 봐도 명쾌하고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글. 그래서 의심스러운 글. 내가 쉽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글의 형태가 있거든. 사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 덜 중요한 것을 빼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글쓰기가 어쩌면 진짜 중요한 것을 제외하거나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이라고 하는 매체에 관심을 갖게 됐어. 나는 글보다 말이 훨씬 어렵더라고. 많이 탐구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가 눈앞에 존재할 때 글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언제부턴가 자유로운 이야기의 구조나 논리의 구조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즉석에서 말로 꺼내서 그 결과를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지금은 일방적으로 내가 너에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네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특수한 설정이 내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거라 확신해. 애초에 내 글을 위해 너를 선택한 거니까. 어쩌면 지금 하는 이야기도 내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것일지도 모르지. 너와 내가 만드는 글. 어쨌든 내 몸에도 다양한 질문과 지식이 축적되어 있을 거 아니야. 다른 방식의 글쓰기랄까. 이야기를 만드는 다른 방식을 탐구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는 구술이 명문화된 것에 비해 불완전한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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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까 전통이라는 단어의 한자 뜻풀이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전할 전(傳), 거느릴 통(統)인데. 전통이라고 하는 건 단순히 오래된 과거가 아니야. 실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 실타래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그 기원을 알 수 없지만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는 관습을 일반적으로 전통이라 부르니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전통은 유동(流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 고정된 틀이 없고, 무한히 팽창하고, 변화하는 거지. 이런 특성 자체가 전통의 강력한 기반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만이 전통을 만들고, 변화시키고, 다음 세대로 전할 수 있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전통은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거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전통은 계속 되는 거야.
그런데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예술계에서 전통을 말할 땐 마치 시작과 끝이 있는 것 같아. 전통과 전통이 아닌 것의 경계가 비교적 선명하다고 해야 할까.마치 거대한 움직임의 일부를 사진으로 포착하고 그걸 전통이라 칭하는 것 같아. 물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 너도 잘 알겠지만 짧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있는데. 이 이야기까지 하게 되면 너무 이야기가 길어지겠지. 물론 먼 역사까지 갔다 길을 잃거나 다른 길을 찾아도 좋을 것 같지만. 여튼 전통을 국가의 정체성과 결부시키며 고정시켜왔던 긴 역사가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될 것 같아.
전통을 제도화 하면서 전통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려졌거든. 전통을 작품으로, 종목으로 포획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맥락이 소거된 거야. 거기엔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포함되어 있는 거지. ‘원형’ 혹은 ‘전형’이라고 하는 매우 신화적인 개념이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 그리고 전통을 선별하는 작업도 있었어. 모든 삶의 전통이 국가의 전통으로 보호 받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 과정에 누가 개입했는지, 그리고 누가 배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전통에 대한 많은 통찰을 주는 것 같아. 전통은 정말로 ‘발명’된 거라고 할 수 있지.
전통 담론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무엇을 어떤 이유로 고정시켜 전승하려 하는지에 대한 반성적 질문이 뒤늦게 수면 위로 떠오른 거지. 전통이라는 개념이 삶과 연결되지 못하고, 산조나 살풀이 같이 특정 종목을 떠올리게 하거나 명사화된 개념처럼 여겨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어. 너는 전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뭐가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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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통을 명사 형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음악이 전통인지 아닌지 따져 묻는 논쟁에는 별로 관심 없어. 이건 보통 전통의 정의나 개념을 묻는 질문이 아니거든. 이건 특정 음악이 제도가 규정한 전통음악의 요소를 얼마나 잘 포함 혹은 구현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야. 이런 질문은 전통이 삶과 괴리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해. 제도권에서 인정하는 몇몇 전통의 문법을 얼마나 잘 포함하고 구현하고 있는가가 어떻게 전통을 가르는 기준이 되겠어. 나는 전통이 음악보다 크고, 작품보다 큰 것이라 생각해. 그래서 나는 반대로 어떤 음악이 왜 전통이라 불리는지에 관심이 많아. 어떤 것은 아무리 전문가가 그건 전통이 아니라고 떠들어도 광범위하게 전통이라고 인식되는 것 같거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고. 나는 그 맥락을 추적하는 데 훨씬 관심이 많아. 가끔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질문 자체를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크기가 우리가 속한 세계의 크기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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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이런 거야. 현 시점에서 정말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제도에서 누락되어 있거든. 대개 불온하거나 저열하거나 ‘나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인데. 나는 이것들이 제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해. 전통을 누가 규정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까.그리고 그들이 수호하려 하는 것, 반대로 혐오하고 멸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해 보게 돼.
두 번째는 조금 더 현실적인데, 제도에서 전통이라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 오늘날 무슨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는 거야. 쉽게 말하면 아카데미와 같은 제도에서 전통이라 배우는 것들. 좁은 의미의 전통. 좁은 의미의 전통도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딛고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전통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무엇을 바꾸어 놓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더라고. 이번 프로젝트는 두 번째 질문에서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어. 제도권에서 할 수 있는 안전하면서도 갈급한 문제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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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통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가치를 승인 받고 있는 것 같아. 하나는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자본, 서구, 제도 같은 힘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체화하는 방식. 나는 두 방식을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 물론 모든 상상력이 자본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그래도 이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생각해보면 전통은 서구 근대와는 다른 토대에서 태동했고, 결국 그 토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전통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거잖아. 물론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전통이 가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어쨌든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봐. 전통은 서구와 자본이라는 거대 시스템이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을 폭로하거나 시스템의 한계를 반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 거지. 서구와 자본이 정한 세상의 수많은 기준을 다시 검토할 수 있게 해준 달까.
그리고 나는 전통이 시스템과 시스템이 부딪히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해. 마치 림보처럼. 너도 잘 알겠지만 기독교에는 림보라는 개념이 있잖아.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곳. 구원 받지 못한,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영혼이 떠도는 장소. 전통의 정체성을 떠올려보면 서구가 만들어낸 개념이나 기준으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면들이 있단 말이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들. 혹은 기존의 개념으로 재단된 채 부분적으로만 이해되거나, 아주 잘못 이해되고 있고 있는 것들. 서구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도, 해석될 수도 없는 세계가 분명히 있으니까. 전통은 세계의 틈에서 또 다른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거지.
나는 정말로 전통이 가진 언어가 세상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 쓸모없다고 여겼던 것들을 다시 불러들이면서 이 세계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거지. 이게 내가 전통의 힘을 믿는 이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