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1: 개념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창작의 과정’

비평적 글쓰기를 위한 전통 의례 리서치

샘플1: 개념들

 

시간

수일동안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의례 현장에서 시간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의례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가 극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의례의 모든 시간을 단일하게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의례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알기 어렵다. 여러 사건과 행위자들의 행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 동시다발적 사건들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의례가 이루어지는 동안 시간의 질서는 느슨해지고, 무질서의 감각이 지배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흔히 의례에 대해 언급하는 ‘현장성’에 대해 재검토해볼 수 있다. 대개 현장성을 떠올릴 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사이의 위계를 전제한다. 무대로 가정되는 공간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주요 사건의 체계적 배열이 존재하고, 이 배열을 구동시키는 방식이 기존 서구의 예술과 다른 작동원리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현장성’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무리가 없다면, 내가 방문한 의례 현장은 ‘현장성’으로 포획되지 않는다. 의례의 시간은 여러 사건, 관점, 행위의 위계를 따지지 않고, 논리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며, 복잡한 사건의 총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흐른다.

물론 의례의 시간을 논리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의례의 절차를 학술적 언어로 명문화하고, 무구와 의복, 음식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영상으로 춤과 음악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가 1960년대 이후로 지속되어 왔다. 의례를 어떻게 저장하고 기억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자연스럽지만, 당연하게도 기록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줄 뿐, 하나의 완벽한 원전으로서 의례 자체를 기록할 수는 없다. 의례의 보호와 생명의 연장을 위해 양산된 기록은 모순에 봉착한다. “아카이브가 살아있는 것이고 자신이 죽은 것인지, 아니면 아카이브가 죽은 것이고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1)” 알 수 없는 모순 말이다. 의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의례를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순을 겪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의례의 시간이 지닌 복잡성과 무질서함은 다듬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보호의 당위를 지닌 기록이 무엇을 보호하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굿을 포함한 전통 의례의 형식에 대한 가장 보편화된 설명은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등이 함께 어우러진 총체연행, 종합 예술이다. 물론 의례에는 각 예술 장르로 바라볼 수 있는 특성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무가의 서사가 지닌 문학적 측면을 논할 수 있고, 수륙재 각 단계에서 연행되는 범패의 음악적 측면을 따져볼 수도 있다. 서구의 장르적 구획에 따르면 의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의례가 하나의 총체로 가정했을 때, 의례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합과 의례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해도 괜찮은 것인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등의 총체로 의례를 파악할 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의례를 의례 자체로, 하나의 총체로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앞서 언급한 예술 장르의 속성을 단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의례의 속성을 서구의 장르 체계에 기대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한다. 둘째 서구의 장르 체계로 의례를 설명할 때 반드시 탈락되는 지점이 발생한다. 판소리를 한국의 연극, 한국의 뮤지컬로 설명할 때 발생하는 문제와 동일하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권력을 가진 개념과 언어를 관통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틈이 있다. 의례는 예술 장르 간의 연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분이 서구 근대성의 한계와 제약에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계의 시학>에서 “전체는 부분들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2)”라고 언급한 에두아르 글리상의 말처럼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요소들이 모여 완결된 하나의 전체를 향하는 것도 아니고, 요소들의 합이 전체와 일치하는 것도 아닌 셈이다. 무언가가 모여 덩어리를 이루지만 그 총체는 매번 달라진다. 부분, 요소로 지칭되는 것들 간의 끊임없는 협상과 갈등이 총체의 상이 하나로 응고되는 것을 막는다. 이러한 의례의 작동원리에 우리는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계속)

***

1) 다이애나 테일러, <퍼포먼스 퍼포먼스>, 나선프레스, 2019, 309쪽.

2) Édouard Glissant, <Poetics of Relation>,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7,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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