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2: 작자 미상의 미완성 스코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창작의 과정’

비평적 글쓰기를 위한 전통 의례 리서치

오늘날 스코어는 작품의 시간을 기록하고 재생하기 위한 기본적인 도구로 여겨진다. 스코어를 작품으로 곧장 등치시킬 순 없겠지만, 스코어에 작품이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스코어는 예술가의 이상이 내재한 원본이자 시간과 망각에 맞서기 위해 고안된 문서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흐르는 시간과 망각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통제하는 데 적극적으로 실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스코어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문서의 모든 것

 

보통 신병을 앓다 신내림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무당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신무라 할지라도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수련이 필요하다. 서울의 만신들이 ‘영검함은 신령이 내리지만 재주는 눈치껏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갓 신내림을 받아 무업을 하지 못하는 견습생을 애동무당이라고 하는데, 애동무당은 수년간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신어머니로부터 굿에 관한 지식을 전수 받는다. 이때 굿에 관한 모든 지식을 ‘문서(文書)’1)라 부른다.

문서는 단어의 뜻 때문에 문자로 기록된 서류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굿과 관련된 이론적 지식과 더불어 굿을 연행하는 데 필요한 기‧예능의 총체2)를 의미한다. 문자로 기록된 지식과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심지어 기록될 수 없는 지식을 모두 통칭해 문서라고 일컫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서의 핵심이 문자화된 지식이 아닌 신체적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체적 지식은 특수하다. 일반적으로 신체적 지식이라고 하면 서구 근대적 사고 속에서 ‘예술’의 장르적 범주로 지칭될 수 있는 굿의 음악적, 연희적 측면을 떠올리기 쉽다. 이를테면 구전으로 이루어지는 노래나 몸짓, 연기술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체적 지식은 ‘의례’와 분리될 수 없지만 ‘예술’의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거나 혹은 모호한 장르적 경계에 있거나 잉여로 간주되기 쉬운 공수, 재담, 마음가짐, 태도, 상차림, 입소문 등을 두루 포괄한다. 문서는 개성, 능력을 결정 짓는 것이므로, 무당들은 자신의 문서를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하며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결국 문서를 익히는 것은 신어머니라는 한 개인의 지식과 기술, 가치관을 신체에 기입하는 것으로, 굿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굿을 실제로 행하고 나아가 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서는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열린 텍스트로서, 무당의 개인적 삶의 경로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고 덧붙여지며 지속적으로 편집된다. 홍태한의 연구에 따르면, 무당은 차별성을 획득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무당의 굿을 보면서 자신의 굿에 없는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자신의 문서를 보충하고 확장한다. 문서는 시간에 의해 무수히 편집되면서 한 명의 무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기록해 나가는 미완의 텍스트다.

 

 문서를 수행하기

 

무당은 문서를 습득하며 특정한 계보를 따르게 되지만, 굿을 할 때 습득한 문서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문서와 실제 굿 사이에는 언제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 실제로 굿을 하는 무당이 문서를 재구성하고 재조합하기 때문이다. 무당마다 문서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다. 굿을 의뢰하는 주체인 재가집의 존재 때문이다. 지루해 하는 절차를 간소화하고 재가집이 원하는 절차를 대폭 확장한다.3)

문서의 궁극적 목표는 원본을 기록해 언제나 똑같이 재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굿이 상황과 맥락에 맞게 구성될 수 있는 밑그림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은 관객으로 ‘번역’할 수 있는 재가집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스코어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지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종종 굿은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정보를 압축할 수 있는 정밀한 수단을 발명하지 못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굿을 비롯한 여러 의례는 오직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다. 보고 듣고 경험하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것들을 몸 밖으로 꺼내 시간의 리듬을 만들어낼 뿐이다.

(계속)

***

1) 문서는 지역에 따라 본서, 설법, 법문, 신법, 경문, 독경, 좌경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양종승, <무당 문서를 통해 본 무당사회의 전통>,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 한국문화연구 4권(2001), 296쪽.

2) 같은 책, 295쪽.

3) 홍태한, <서울굿판 ‘ 문서’ 의 존재와 구비문학 연구의 지향점>, 실천민속학연구 제26호(2015), 162-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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