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3: 적용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창작의 과정

비평적 글쓰기를 위한 전통 의례 리서치

(1)

“단 하나의 예외 없이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 사회에는 인생에서 문턱을 넘는 순간을 표시하는 고도로 짜여지고 공식화되고 정확하게 집행되는 행동을 수반한 다양한 전통이 있다. 우리가 의례라 부르는 이런 행동은 명시적인 용도가 전혀 없거나, 설령 있더라도 언급되는 목표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착수하는 행위와 인과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기우제 춤을 춘다고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저주 인형 찌르기로는 멀리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하고, 타로 점술가가 믿을 만하게 예측하는 것이라고는 상담 후 당신 지갑이 가벼워지리라는 점뿐이다. 교수가 힘든 노동이 필요한 물건에 명백한 기능이 없으니 아마도 의례적 목적에 이바지했으리라 추론한 까닭은 바로 이 수단과 목표 사이의 공백에 있었다.”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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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는 목표로 한 실질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 죽은 후 극락왕생하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공덕을 쌓는 생전예수재를 지낸다고 해서 극락왕생 하는지 알 수 없고, 49재의 한 형태인 영산재를 지낸다고 해서 죽은 사람의 행방을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이 의례를 의례로 만드는 중요한 본질이다. 사람들은 의례의 실제적인 효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음에도 의례의 중요하다고 말하며 심지어는 오래 전부터 진행해 왔던 ‘전통’이라고 말한다. ‘합리’의 관점에서 의례에 대한 집착은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이며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의례의 힘은 강력하다.

굿을 비롯한 의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죽음이다. 인간은(혹은 종교는) 어떤 이유로 죽음과 관련된 의례를 발전시켜 왔을까? 우리는 왜 이토록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데 많은 수고를 들이는 것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의 세계로 넘어간 혹은 넘어가고 있는 자를 위한 절차들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의례의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과 같은 이분법적 개념의 경계를 이어 붙일 수 있기 때문일까? 공포와 슬픔 극복하기 위해 의례라는 도구를 발명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의례는 인과적 관점에서 사건에 대한 결과, 즉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 혹은 인간의 ‘본질’과 더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2)

“<바리데기>는 버려진 여자아이의 모티프로 쓰인 신화이다. ‘바리’는 버린다는 뜻 이외에, 순수 우리말인 ‘발’ (없던 것이 새로이 일어난다)의 연철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생산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바리공주는 생명공주, 소생공주, 생산공주가 된다. 그러기에 ‘바리’는 플라톤의 파르마콘처럼 독이면서 약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이 버려진 여자아이 이야기가 하필이면 죽음의 공간을 누빈다. 가부장제 사회의 이승은 남성들이 통치하지만, 저승은 버려진 아이 바리데기의 안내 없이는 갈 수가 없다. 어쩌면 바리데기의 저승은 여성이 만든 자시만의 비실재적인, 그러나 그녀에게는 실재적인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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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는 한국의 무속신화로 무당의 조상신으로 일컬어진다. 왕과 왕비의 일곱 번째 딸이었던 바리데기는 여자라는 이유로 버려진다. 시간이 흘러 왕과 왕비가 아프게 되고 왕은 저승에 가서 약을 구해 올 사람을 찾게 된다. 신하와 여섯 명의 딸은 거절하지만 바리데기는 저승에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저승에 간 바리데기는 남편을 만나 9년 동안 집안일을 하고 아이도 낳는다. 결국 약을 구해 와 부모를 살리게 되는데,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부모의 말을 거절한다. 저승에서 많은 슬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리데기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된다.

로렌 켄달의 지적처럼 여성은 성인이 되어 자신이 성장한 가정을 떠난다. 이는 바리데기의 신화와 비슷하다. 그리고 결혼한 여성은 두 친족 집단 사이를 왕래하며 양측 집안의 신령과 조상을 달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여성적 특성은 바리데기 신화와 닮아 있다. 무당과 여성의 기본 전제는 자신이 자신의 울타리로부터 내쫓기고, 그렇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사회라는 큰 시스템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며 밖으로 추방당한 존재들을 위해 그들의 목소리를 복권하는 존재인 것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 당했던 의례의 두 주인공은 부정 당한 그 경험 때문에 타인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3)

“잠시 레비스트로스의 잘 알려진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자. 앞서 살펴봤듯이 복수의 이항대립 간의 대립과 상관에서 무문자사회나 신화의 구조가 포착된다고 할 때,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하는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사고에서 의미체계의 “요소와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동일평면 위에 놓인다”는 점이다. 즉 확정적인 요소들이 조합되어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점차 완성된다는 근대인이 질서정연한 세계를 생각할 때 떠올릴 만한 착실한 적재의 방향성이 여기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무문자사회나 신화의 의미체계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변해도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불변할 수 있으며 또 같은 요소들이 완전히 다른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맺고 ‘변환’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변이에 대한 고찰이야말로 레비스트로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요소와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동일평면 위에 놓이는 방식에 기반해 생겨난다. 즉, “요소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확정적으로 “요소들”이 도출되는 것도 아니고 “요소들”로부터 확정적으로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도출되는 것도 아닌 그 ‘어느 쪽도 아닌’ 상태에서 생겨난 다양한 변이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추출되는 ‘구조’다.” 

[오쿠노 카츠미, 시미즈 다카시, <오늘날의 애니미즘>, 6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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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의례의 각 요소—주술, 제물, 춤, 노래 등—그 자체일까? 아니면 이 요소들 간의 관계일까? 어쩌면 굿에서 중요한 것은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고정된 형태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며 변형되는가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례의 요소가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을 더 구체적이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언어 체계로 포획되지 않는 요소들을 붙잡을 수 있을 때 요소들의 총합이 달라지게 될 것이고, 의례의 모습을 조망하는 방식도 이전과는 달라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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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2: 작자 미상의 미완성 스코어